“얘야, 인생에 답이 없으나 맛은 있단다. ‘옛날’이란 맛은 더 오묘하거든.
오랫동안 쳐 놓은 꿀집을 털어 그 맛을 보여 주련?”
황혼의 여정에서 빚어내는 자전적 소설
세 살 손주가 말문이 트이더니 걸핏하면 “옛날에, 옛날에.” 한다. 손짓, 고갯짓, 제스처를 써 가며 유식한 체 힘주어 말한다. 감히 어른의 전용어를 도용하다니. 제 엊그제를 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대겠단다.
조금 더 크면, “인생은 답이 없으니까 살기가 애매하다.”라며 다리를 꼴 것 같다.
그때를 위해 준비해 둔 말이 있다.
“얘야, 인생에 답이 없으나 맛은 있단다. ‘옛날’이란 맛은 더 오묘하거든. 오랫동안 쳐 놓은 꿀집을 털어 그 맛을 보여 주련?”
어린 시절의 말 소리와 생각, 정경의 자취를 두름으로 엮는 건 여유로운 회상의 재미일 거라 여겼다. 웬걸? 가물가물한 기억, 밭은 감성을 되작이며 순수의 근원지를 찾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. 생기 빠진 가을 이파리처럼 생각은 바삭대고, 이마를 톡톡 건드린다고 봉숭아 씨앗처럼 탁 터져 나오는 것도 아니니.
능선을 넘고 굽이굽이 유곡을 건너온 은청빛 새벽이 벗처럼 한결같다.
눈에 밟히는 추억, 꿈결 같은 순수의 소리, 눈물 나는 감격의 향내, 잊기가 아까워 못 잊을 흔적들이 어린다. 울담 밑 이끼처럼 겹겹 묵은 기억들.
아이가 깔깔대는 소리, 아버지의 기침 소리, 어머니의 옷자락 소리, 대숲을 가르는 냇물 소리, 아낙네의 타령이 들린다. 그 시절의 단내, 썩은 내, 비린내, 몽롱한 꽃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.
요람을 기어 나온 아이가 살금살금 다가온다. 솜털도 없고 뼈마디는 연하고, 설렁설렁 걸으며 싱긋빙긋 웃는 아이다.
전쟁 통에 태어난 아이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