책을 만나는 건 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. 그런데 책을 만드는 것 또한 운명이었다. 친정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말기 암 판정을 받으셨을 때, 난 왜 아버지께 책을 헌정할 생각을 했을까? 얼마남지 않은 아버지의 삶에 왜 내 책이 기쁨을 드릴 거라고 생각했을까?
호스피스 병원에 계시던 아버지는 역시나 기뻐하셨다. 네 책을 품에 안고 천국가련다...웃으시며 말씀하셨다. 그러나 사실 그 때 내 삶은 책을 내기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. 매일 꼬박 21시간씩 두 번째 뇌출혈로 쓰러진 남편을 보살피고 있었으니 말이다. 어쨌든 당장 출판사를 알아봐야 했다. 이리저리 머릴 굴려봐도 답이 안 나왔다. 걱정하고 있는데 남편이 평소에 믿고 의지하던 목사님께 한번 여쭤보라고 강권한다. 그래서 전화를 드렸더니 광고창에서 좋은땅 출판사를 몇 번 보았는데 괜찮은 것 같다, 한번 알아보라고 하셨다. 좋은땅 출판사와는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. 맘이 급하기도 했지만 표지는 글과 같은 결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출판사에 맡기지 않았다. 출판사는 쿨하게 동의했다.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현재 산돌디자인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큰 딸에게 둘째 딸이 10살 때 그린 그림으로 표지 디자인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. 표지 디자인은 금방 완성됐다. 그러나 책 교정을 보고 있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두 달 뒤 내 책을 품에 안지 못하신 채 돌아가셨다. 그 후 나는 제대로 원고를 보지 못했다. 내 마음 가는 대로 멈추거나 연락해도 되는 이 출판 구조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.
만약 빨리 교정을 봐달라고 독촉했거나 마감 날짜를 정해놓았다면 이 책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. 연말이 다가오면서 아버지와의 약속이 마음에 걸렸다. 결국 달력의 마지막 장이 넘어가기 전 책이 완성되었다. 내 바램은 극적으로 단순하면서 꾸밈없는 책을 내고 싶었다. 여자로 말하자면 치장을 전혀 하지 않은 민낯 그대로인 상태, 그리고 도자기로 말할자면 초벌구이같은 책이고 싶었다. 왜냐하면 내게는 쏟을 수 있는 에너지가 거의 없었기 떄문이다. 독자에게 친절을 베풀 여유가 없었다.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야 했다. 가장 저렴한 인쇄비를 위해 한 달동안 작업했던 모든 사진을 지웠다.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없고, 표지에 작가 이름이 없는, 작가 프로필 사진은 오래전 누워서 옆으로 찍은 셀카(딸들과 남편이 추천했다.)에 마케팅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제목... 이 모든 실험적 상황에 딴지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. 이게 바로 결정적인 좋은땅 출판사의 매력이다. 뭐든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거. 자유다. 내겐 자유가 가장 중요했다. 결국 내가 원하는 책이 탄생했고,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좋은땅 출판사에 감사드린다. 책이 만들어진 것 또한 운명이다. 아버지는 이미 그걸 아셨고, 하늘에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도우셨다. 이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조차 하늘이 하실 일이다. 단 한 사람이라도 운명처럼 내 책을 만난다면...그것이 이 책의 존재 이유다.